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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 365일] 금정산 호국사찰, 범어사 소개

by Jigton GAL 2023.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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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는 의상대사의 전교십찰(傳敎十刹) 중의 하나이면서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호국사찰(護國寺刹)로 세워졌다.

 

이 절은 신라 문무왕 18년(678)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 영조 22년(1766) 동계(東溪)가 지은 <범어사창건 사적>에는 835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의상대사(625-702년)의 사후 1백30여 년이 지난 다음이어서 맞지 않다.
따라서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화엄(華嚴)을 8년간 수학한 다음 671년 귀국하여 화엄의 근본도량인 영주 부석사를 676년에 창건하고, 그 2년 뒤 범어사를 세웠다. 따라서 동계가 말한 신라 흥덕왕 때에는 범어사를 크게 개창한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범어사창건사적기>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금정산을 찾게 된 것은 왜구를 무찔러 달라는 왕명 때문이었다고 한다. 동해에 왜인들이 십만 병선을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려하자 신라 왕이 큰 근심에 싸여 있는데 문득 신인이 나타나서 걱정하지 말라 며 이렇게 말했다.


“태백산에 의상이라는 스님이 있는데 이 분은 금산보개(金山寶蓋)여래의 제7후신으로 항상 성중(聖衆) 범중(凡衆) 귀중(鬼衆) 각 1천씩 모두 3천 대중을 거느리고 화엄의지(華嚴義持) 법문을 연설하고 있어 화엄신중(華嚴神衆) 40법체(法體)와 제신(諸神) 천왕(天王)이 늘 따라다니며 보호한다. --- 대왕이 의상대사를 모시고 동해변의 금정산 금샘바위 밑에서 칠일 밤낮동안 화엄경을 독송하면 미륵여래가 금색신(金色身)으로 나타나고, 사천왕이 각각의 병기를 가지고 색신으로 나타나며 비로 자나여래가 금색신을 나누어 보현·문수보살과 천왕을 거느리어 동해에 나가면 왜병은 자연히 물러갈 것이다. 후대에 화엄정진을 계속한다면 자손이 끊어지지 않고 전쟁이 그칠 것이다.”


이에 왕은 신하를 보내 의상대사를 모셔와 일러준 대로 하니 보살과 천왕신중이 나타나 병기로 위협하고 바다를 뒤집어 놓으며 바람과 불로 공격하여 왜적을 무찔렀다. 왕은 대단히 기뻐하여 의상대사를 예공대사(銳公大師)로 봉하고 금샘바위 아래에 2층 미륵전을 짓고 미륵석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범어사는 내원암과 금강암 앞을 지나는 두 줄기 계곡을 양쪽에 끼고 있다. 입구인 일주문에서 천왕문 불이문 보제루 대웅전을 동서 일직선으로 배치하고 주변에 관 음전과 미륵전 요사채를 앉혔다.


<사적기>에는 창건 당시 절에는 미륵전 대장전 비로전 천왕신전 유성전 종루 강전 목욕원 등의 전각과 요사 360방이 양쪽 계곡에 들어섰다고 하였다. 18세기의 기록이라 신뢰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창건 당시부터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의상대사가 창건했던 사찰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10년 동안 폐허로 버려졌다가 1602년 중건됐으나 다시 화재로 소실되고 지금의 것은 광해군 5년(1613) 에 중창됐다.


가람배치는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대웅전을 향해 대략 상·중·하 3단으로 되어 있다. 즉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과 불이문의 입구 구역이 하단이고 여기서 계단을 통해 보제루에 올라서면 그 북쪽에 종루와 미륵전 비로전 금어선원 등이 있고, 남쪽으로는 심검당과 원웅당을 비롯한 십여 채의 요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범어사가람의 가장 넓은 중단구역이다. 그리고 상단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남쪽에 관음전지장전과 팔상·독성·나한의 삼전, 그리고 산령각 등이 들어서 불보살과 조사 신앙이 어우러진 곳이다.

 

 

범어사 송림.

 

범어사 입구 매표소까지 계단을 올라 왼편의 계곡 물소리를 벗 삼아 걸으면 어산교(魚山橋)를 건너게 되고, 곧 왼쪽에‘ 惺月堂一全(성월당일전)’이라 새긴 길게 누운 바위가 있다. 오른편 소나무숲 속에는 당간지주(부산광역시유형문화재 15 호)가 서 있다.

 

 

▼천왕문. ▼▼불이문. 
■일주문(조계문).

그리고 서쪽으로 길게 뻗은 길 저쪽에 나지막한 일주문(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이 보인다. 문으로서의 기능보다는 부처님이 계시는 절집으로 들어가는 영역의 경계 즉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는 상징적인 공간인 이 일주문은 그 모습이 독특하다. 보통사찰에 서는 기둥이 두개인 한 칸짜리인데 비해 일렬로 늘어선 투박한 네 개의 둥근 돌기둥 위에 짧은 나무기둥을 또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을 얹은 삼 칸짜리다. 기둥 사이 세 개의 문 위에는 중앙에 曹溪門(조계문), 왼쪽에는 金井山梵魚寺(금정산범어사), 오른편에 禪刹大本山(선찰대본산)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일주문을 지나 13단의 높은 돌계단을 오르면 축대 위에 사천왕상을 모신 사천왕문이 있다. 사천왕은 동서남북의 사방에서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맞배지붕인 사천왕문 안에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각각 비파와 칼 여의주 탑을 들고 서있는 사천왕상 4위가 좌우의 협간에 봉안되어 있고 중앙이 통로다.


세 번째의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불리는 불이문 (不二門)은 이 문을 드나드는 이들은 누구나 진리를 깨닫고 잊었던 본성을 되찾으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정면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기둥에는“神光不昧萬古煇猷(신광불매만고휘유:신광의 밝고 오묘한 뜻을 알기 위해서) 入此門來莫存知解(입차문래막존지해:이 문을 들어서면 서부터는 세상의 알음알이를 논하지 말라.)”는 동산스님이 쓴 주련이 걸려 있다.


일주문과 사천왕문, 그리고 불이문은 절집의 외곽에서 속세와 성지를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이곳을 지나 새로 단장한 담장을 보면서 보제루에 이르면 비로소 불법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곧 중단구역은 불법의 광대한 세계가 펼쳐지는 곳이다. 보제루를 시작으로 북쪽에 종루와 미륵전 비로전 금어선원, 그 남쪽으로 심검당과 원웅당을 비롯한 십여 채의 요사등 많은 전각이 들어서 있다.

 

 

 

▼▼관음전. 
■보제루. ▼지장전

 

 

 

불이문을 들어서서 보면 20여 계단 위쪽에 웅장한 전각이 보인다.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을 지닌 보제 루(普濟樓)는 정면 5칸 측면 3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된 단층 건물로 절 안에서는 규모가 가장 큰 건물로 2012년 중창하였다. 불이문에서 중단구역으로 가려면 보제루 중창 전에는 오른쪽으로 돌아 올랐으나 지금은 보제루 아래로 15계단만 오르면 된다.


숙종 25년(1699)에 지었다는 보제루에는 3개의 현판 이 있었다. 불이문에서 보는 정면에는 梵魚寺(범어사) 현판을 달았고, 普濟樓(보제루)라는 제 이름표는 앞마당 쪽에, 그리고 그 밑에 작게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 는 현판을 또 걸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입구 쪽인 불이문에서 바로 보이는 곳에 보제루 현판을, 안마당 쪽에는 동산스님 글씨의 금강계단이라는 현판을 달아 대웅전을 쳐다보게 했다. 


보제루 앞마당에는 신라시대 3층 석탑(보물 제250호) 과 석등(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6호)이 있다. 미륵전 앞의 높이 4m인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3층으로 9세기의 전형적인 양식이지지고 지금은 노반과 보주만 남아있다. 심검당 앞의 석등은 높이 262cm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취하고 있지만 옥개석 위에 얹힌 노반(露盤) 등은 제 짝이 아니다. 석탑과 석등은 모두 의상대사가 조성한 것이라고 전하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보제루 북쪽에는 2층 종루가 있다. 아침 저녁 예불이나 의식에 사용하는 범종과 법고 운판 목어를 봉안한 건물이다. 임진왜란 때는 승군 지휘소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심검당 앞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중단구역의 오른쪽에 미륵전과 비로전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용화전이라고 도 불리는 미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맞배지붕 건물로, 안에는 목조미륵불 좌상을 봉안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미륵전이 범어사의 주불전으로 2층건물에 4위의 미륵불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석조인 서·남·북쪽의 3위는 없어지고 동쪽의 목조미륵불만 지금까지 남아 있다.

 

대웅전과 3층 석탑.


범어사의 많은 불상 중에서 특이한 내력을 간직한 것이 바로 이 미륵전의 불상이다. 미륵전의 문을 열고 보면 불상이 정면에 안치되어 있지 않고 오른쪽의 동쪽 벽면을 등지고 서쪽을 향해 앉아 있다. 그 까닭을 숙종 40년(1714)에 쓴 <미륵조상중수기>에 다음과 같이 밝혀 놓고 있다.만 상륜부는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노반과 보주만 남아있다. 심검당 앞의 석등은 높이 262cm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을 취하고 있지만 옥개석 위에 얹힌 노반(露盤) 등은 제 짝이 아니다. 석탑과 석등은 모두 의상대사가 조성한 것이라고 전하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임진난에 절이 불타고 나서 남은 승려들이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10년 뒤인 선조 35년(1602)에 홀연 미륵전 터에서 부처님 얼굴 반쪽이 나타났다. 원래 미륵전에는 동·서·남·북 4미륵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돌미륵은 모두 없어지고 나무미륵만 10년 동안 땅속에 묻혀 보존되었다. 이는 원래 방왜(防倭)의 상징으로 왜국을 등지고 앉게 모신 부처님이다.’


미륵전과 함께 중단구역의 중심을 이루는 전각이 비로전이다. 앞면과 옆면이 각 각 3칸에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한 비로전 안에는 범어사가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창건되었음을 뜻하는 목조 비로나자삼존불 좌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뒤로 후불탱을 배치하였다. 삼존불의 중앙에는 비로나자불이고 좌우에 조금 작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하였다.


미륵전과 비로전 뒤에는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 수행하는 공간인 금어선원이 있다.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금어에서 선원의 이름이 유래하는 금어선원은 원래 지금의 관음전 자리에 있었는데 1968년 청풍당을 헐고 이전, 신축하였다. 

 

범어사 돌담.

 


중단구역의 남쪽에는 심검당(尋劍堂)을 비롯하여 원웅당 암심료 설현당 등의 요사가 집결한 스님들의 생활공간이다. 원웅당은 승가대학으로 1613년 지은 건물로 앞면 10칸 옆면 4칸의 맞배지붕 양식이다. 범어사 승가대학은 1966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매년 초학자들의 경전탐구가 끊이지 않는다.

 

▼종루. ▼▼성보박물관. 
■비로전과 미륵전.


보제루에서 3구 20계단의 돌계단을 오르면 범어사의 금당인 대웅전(보물 제434호)을 중심으로 남쪽 위에 산령각이 있고 그 아래 왼편 에 팔상·독성·나한의 삼전을, 또 삼전 바로 아래 오른편에 지장전을, 그리고 지장전과 관음전을 대웅전의 좌우에 나란히 배치하고 있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과 기단에는 각각 동백꽃과 동백나무 가지를 조각하여 불국토(佛國土)의 아름 다움을 장엄(莊嚴)하였다. 계단의 소맷돌에는 화재(火災)를 방지하는 의미에서 세운 해태상이 해학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대웅전은 숙종 39년(1713)에 중건, 단청하고 40년에 대웅전 앞 돌계단을 고쳤다고 하나 조선시대 중기 이래의 간결하고 힘찬 다포식 건물로 앞면과 옆면 각 3칸 의 다포식 맞배지붕 양식이다. 대웅전은 보통 팔작지붕을 올려 시각적으로 건물의 중량감을 더하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예외적으로 맞배지붕을 올렸다. 대웅전의 맞배지붕 양식은 다른 전각에도 영향을 미쳐 범어사에 는 유난히 맞배지붕이 많다.


내부의 불단에는 여러 가지 꽃무늬와 비천상들을 화려하게 조각 장식하였다. 위의 닫집이 매우 화려하고, 아래는 용과 봉황이 구름 속에서 노니는 모습을 실감나게 조각해 놓았다. 동·서벽에는 동방 약사삼존과 서방 미타삼존을 벽화로 그려 석가 세존과 함께 삼계여래(三界如來)를 상징하고 있다.

 

 

 

 

 

불단 한가운데에는 목조석가여래좌상을 주존불로 하는 삼존불좌상을 모셨고 그뒤에 후탱불, 왼쪽 벽에 삼탱불, 오른쪽 벽에 신중탱을 두었다. 석가여래좌상의 좌우에 협시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셨다.


대웅전을 가운데 두고 왼쪽의 지장전과 오른쪽의 관음전이 협시하는 듯 한 구조이다. 지장전은 1990년에 탑을 일주문 옆의 탑전으로 옮긴 자리에 신축하였다. 앞면과 옆면이 각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인 지장전 안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그리고 시왕상을 봉안하였고 문 입구에는 금강역사가 있다. 절에는 본래 명부전이 있었으나 1988년 소실되었다.

 

관음전은 본래 대웅전의 왼쪽에 있었으나 1938년 대웅전 오른쪽에 있던 금어선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이곳으로 이전해 건립하였다. 크기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뒷벽에는 관음보살탱을 봉안하였다. 불교의 많은 불보살 중에서 관음보살은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자비의 화신으로서 모든 중생에게 차별 없는 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이다.

 

좌 석조. 중 석등. 우 당간지주.

 

 

팔상전(捌相殿)과 독성각(獨聖閣), 나한전 (羅漢殿)은 하나의 건물로 모은 절집이다.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이전각은 원래 따로 있던 것을 1905년(광무 9)에 학암스님이 이들 삼전을 중건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면 7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왼쪽부터 팔상전 독성각 나한전이 다. 팔상전에는 소조삼존불을 중심으로 후불탱과 팔상탱을 좌우에 봉안했다. 중앙 네 번째 칸의 독성각에는 나한존자상과 독성탱, 우측 세 번째 칸의 나한전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후불탱, 나한을 안치하였다.


한국불교가 재래의 토속신앙을 수용하면서 불교화한 독특한 존재인 산령각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안에는 산신과 호랑이를 그린 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늘 가람의 가장 뒤쪽에 자리하여 불법을 보호하는 기능을 맡고 있다. 

 

이 외에 범어사에 가면 어산교와 일주문 사이의 오른쪽 숲 속에 있는 당간지주(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호)와 일주문에 들어서기 전 오른쪽에 있는 성보박물관도 둘러보아야 한다.

 

<梵魚寺誌(범어사지)>에는 금정 범어팔경(梵魚八景)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어산노송(魚山老松-어산교 주변의 울창한 소나무), 계명추월(鷄鳴秋月-계명암에서 바라보는 가을 달), 청련야우(靑蓮夜雨-청련암에서 밤에 듣는 빗소리), 대성은 수(大聖隱水-대성암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내원모종(內院暮鐘-내원암에서 듣는 범어사의 저녁 종소리), 금강만풍(金剛晩楓-금강암 주변의 늦가을 단풍), 의상망해 (義湘望海-의상대에서 바라보는 바다), 고당귀운(高堂歸雲-고당봉에 걸리는 구름)

 

 

 

❖ 참고 <사람과 산> <역사와 문화현장체험 부산을 배웁시다)> 부산민학회 267~302쪽

 

부도.

 

 

 

* 저작권은 부산산악포럼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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