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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 365일] 금정산성 소개, 산성 일주 답사(踏査) | 산성따라 산행코스, 금정산성 일주산행

by Jigton GAL 2023.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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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성 안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최대 규모인 금정산 성은 사적 제215호(1971.02.09)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숙종 29년(1703)에 국방을 튼튼히 하여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쌓 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금정구 금성동을 중심으로 한 산성 면적은 830,370.24m2이며, 길 이 17,336m, 성곽 높이 1.5~6m이다.


낙동강 하구와 동래 지방이 내려다보이는 요 충인 이 성은 바다로 침입하는 왜적에 대비하 기 위한 것이었다. 성곽의 규모나 성벽의 축조 양식으로 보아 처음 축성된 시기는 현재 남아 있는 기록보다 훨씬 앞선 시기까지 올려 볼 수 있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견해다.

 

이 산성은 임진란의 혹독한 피해를 당한 동래부민 뿐만 아니라 양산 김해 등 인 근 주민들까지 동원되어 쌓은 피란을 겸한 항전성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 래가 차지하는 위치는 다른 고을에 비할 수 없이 중요했다. 나라의 남쪽 관문이라 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난리의 시작과 함께 적의 첫 상륙 지점으로 제일 먼저 전화 를 입었고 굳센 항전을 계속한 곳이기에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또, 난리의 장기화에 따라 적의 교두보로서 오랜 수난이 계속된 곳이기도 하다. 해발 801.5m인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의 서남쪽 계곡을 안고 능선을 따 라 축성, 동서남북 사방의 성문과 수구문 암문 등의 시설이 있다. 고당봉에서 동제 봉까지의 동쪽 성벽에 이어 망미봉과 생기봉을 잇는 남쪽 성벽, 그리고 파류봉을 지나 장골봉까지의 서쪽 성은 500~600m의 분수령을 따라 험준한 지형과 암벽을 이용하여 자연 그대로 1.5~3m의 높이로 지형의 굴곡과 고저에 따라 쌓았다. 성벽 의 요소요소에는 포루와 암문을 설치하였다. 당시 성내에는 군량과 군비를 비축 하고 관리할 중군소와 군기고. 산성창 등 필요한 건물이 마련되고, 승군이 기거하는 국청사와 해월사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국청사만 남았다.

 

금정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성되었을 것이라는 흔적은 있으나 지금의 성은 조선시대에 건설되었다. 효종 때 동래부사 임의백(任義伯)이 금정산에 축성(築城)을 건의하였고, 현종 8년(1667)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이 왕에게 불려가 대구를 방어 할 책략을 말하는 가운데“금정산은 형세가 절승으로 기지가 완연하여 이제 만약 완전히 보수하기만 하면 보장할 수 있는 터전이 되겠습니다”고 하였으나 이후 논 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숙종 때 영의정 허적(許積)은 승지 권대재(權大載)의 견해 를 빌어“동래에서 불과 15리 떨어진 곳에 왜관이 있고 그 왜관에는 왜인이 천여 명, 적어도 오륙백 명이 늘 있습니다. 그런데 동래부의 속오군(束伍軍)은 겨우 오 초(五哨)단위이고 이 별무사 군관을 합친 데야 육칠백 명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방비책으로 부의 뒤에 있는 금정산과 산 뒤에 있는 범어사를 합쳐 축성하면 좋겠습니다.”고 하고 있다.


그 후 숙종 27년(1701)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상계하자 왕이 동의하면서 축성이 시작되었다. 조정의 동의를 얻은 조태동은 동래부사 박태항(朴泰恒)에게 공사를 주관하도록 하여 성을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숙종 27년(1701)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동래부 사 박태항(朴泰恒)으로 하여금 책임지고 쌓게 한 것으로 둘레 길이 9,011보, 높이 15척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에 앞서 현종 8년(1667)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이 왕 에게 금정산성을 보수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금정산성은 이 미 오래 전에 축성되어 있었으나 돌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숙종 33년(1707)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성이 너무 넓다하여 성의 중간에 남북을 구분하는 중성을 쌓고 장대(將臺)와 군기고 등의 시설을 보강하였다. 그 후 영조 50년(1774)에는 성이 너무 커서 지키기 어렵다하여 일단 혁파하였다. 그러나 순조 6년(1806)에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성을 다시 고쳤다. 1824년에 보다 적극적인 경영에 나서 동문을 신축하였으며 서·남·북문에 문루를 만들고 수비군을 배치하였다. 이때의 길이는 32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숙종 이래의 산성 수축공사의 경위를 새긴 금정산성 부설비가 지금의 장전동에 서있다. 산성에는 산성별장 1명과 군관 2명, 진리(鎭吏) 2명, 지인(知印) 2명 사령(使令)4명을 배치했다. 성벽은 화강암을 자연석 그대로 이용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 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72년 동문과 남문, 1974년 서문과 수구문 망루를, 1989년 북문을 각각 복원하였다.

 

산성 일주 답사(踏査)

 

금정산성 동문

 

산성일주 산행길 소요시간  약 7시간

동문 → 산성고개 → 대륙봉 → 제2망루 → 남문 → 망미봉 → 헬리포트 → 제1망루 → 파리봉 → 기도원 입구 → 서문 → 중성 갈림길 → 도원사 → 사시골 암문 → 장골봉 → 물리재 끝 제2석문 → 부산학생교육원 갈림길 → 제2금샘갈림길 → 금곡동갈림길 → 미륵암갈림길 → 칠바위 → 북문갈림길 → 고당봉석문 → 동쪽성시작점 → 북문 → 원효봉 → 의상봉 → 제4망루 → 상마 갈림길 → 제3망루 → 구서동 갈림길 → 장전동 갈림길 → 동문·중성 갈림길 → 중성 석문 → 도로 → 계곡 → 북문 지름길 → 제4망루 → 동문

 

 

금정산의 여러 코스를 자주 찾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의식하든 않든 짧기는 하지 만 산성의 성벽을 따라 오르내리게 된다. 그러나 조금 고생할 각오 없이는 산성을 일주하기 힘들다. 특히 7~8시간이라는 긴 산행 시간도 문제이지만 파리봉에서 서 문으로 이어지는 성벽과 서문에서 물리재 끝 암문까지를 잇는 성벽주변 길이 제대 로 정리되지 않아 사실상 일주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완전하지는 않 지만 일주로가 열려 산성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차차 늘고 있다. 

일주는 산성행 버스나 승용차로 접근이 쉬운 동문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차 량을 이용해 동문까지 올라야 조금이라도 체력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문에 서 시작한다면 시계방향으로 일주하거나 그 반대로 돌든지 그것은 각자가 선택 할 문제다. 그러나 몸에 피로가 덜한 오전 중에 파리봉을 넘고 서문을 거쳐 물리 재 끝 성문까지 올라서는 것이 등산의 효율을 높인다는 점에서 시계방향으로 돌 기를 권하고 싶다.
아치형의 동문은 금정산 주능선의 잘록한 고개(410m)에 자리하고 있다. 이 문 은 동래성에서 가장 접근하기 쉬워 산성의 관문으로 성을 굳게 지키는 역할 못지 않게 전망이 뛰어나 망루로서도 손색이 없다.

 

 

‘정묘년(순조 7년, 1807년) 가을에 이르러 토목공 사를 잇달아 일으켜 한 달 만에 동문이 완성되었다. 이듬해 정월에는 기둥과 들보를 백리 밖에서 운반 하고 벼랑에서 낭떠러지를 깎아 내는데 메고 끄는 사람이 구름처럼 많이 모여들어 만(萬)사람이 힘을 일제히 쓰니 149일만에 동·서·남·북문의 초루 (성문위의 누각)가 완성되었다.’동래부사 오한원 (吳翰源)이 금정산성 증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부 설비문의 일부다. 그 자신이 글을 짓고 썼다고 하니 이것이 동문을 다시 세운 공식기록인 셈이다. 이 기 록에 따르면 동문은 1807년 10월에 준공되었다. 

 

특히 동문과 성첩은 동래읍민이 일을 맡았고, 나머지 서·남·북문과 성곽은 영남의 71개 주(州)에서 차 출한 민정(民丁)의 부역으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동문은 당시에 세운 그것이 아님은 물론 이다. 일제(日帝)가 이 땅을 지배하면서 그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세웠던 이 성과 성문, 군·관아시설 등을 파괴, 크게 훼손했다. 동문에서 남쪽으로 새로 잘 쌓은 성벽을 따라 7~8분 정도 걸으면 산성고개에 닿는다. 포장도로를 따라 그대로 서쪽으로 내려가면 산성마을이고 남쪽으로 뻗 은 비포장도로는 남문과 연결되어 있다. 성을 넘어 왼쪽으로 빠져 5분이면 대륙 암에 닿는다.

 

 

산성고개에 걸린 육교를 지나 성을 따라 5~6분 오르면 경사가 심해지면서 목재계단이 나온다. 성벽은 거의 허물어져 주변에 돌들이 뒹굴고 있다. 등산로와 성 벽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거듭하지만 성벽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고 목재계단까지 있으니 오르기에 별 어려움이 없다. 전망대 바위에 올라서면 북쪽으로 고당봉이 빤히 마주 보이고 동남쪽으로 장전동에서 광안리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바위를 이리저리 넘어야 하지만 곧 넓은 반석이 나온다.

■대륙봉 평평바위. ▲산성고개 육교.

 

산성고개와 제2망루 사이의 높은 봉우리(국가지점 번호 마라 4209 9471)인 해발 520m의 대륙봉 (大陸峰)이다.

 

금정산성 제2망루.


바위 사이로 내려서면서 성벽은 처음 내리막이었다가 소나무 숲 사이를 지나는 등 10분 정도 걸으면 왼쪽으로 갈림길(국가지점 번호 마라 4189 9416)이 나온다. 호국사로 내려가는 등산로다. 오르막이 시작된다. 왼쪽의 성벽을 따라 오르는 길 은 곧 성벽과 멀어지지만 다시 성벽위로 걷다보면 해발 548m의 제2망루가 있는 동제봉(東帝峰)에 올라서게 된다.


동문에서 남쪽으로 약 2.5km, 남문에서 동쪽으로 약 400m 지점에 있는 제2망루는 다른 망루보다 다소 초라하며 별다른 장식이 없다. 그러나 이곳 역시 동래 일대 와 동해까지 한눈에 굽어 볼 수 있는 훌륭한 조망을 지니고 있다. 제1, 2망루는 타 원형의 금정산성 남쪽 양단(兩端)에 자리한 것이 특징이다.
제2망루에서 남문까지는 7~8분이면 충분하다. 성 안으로 길이 있지만 왼쪽으로 내려와 성벽을 바라보며 걷는 것이 더 멋있다. 동제봉(東帝峰)과 상계봉을 잇는 능선 상의 잘록한 고개(510m)에 서 있는 남문(국가지점 번호 마라 4168 9386)은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이 오히려 돋보인다.


남문 북쪽 바로 아래의 옹달샘이 낙동강으로 흘러내리는 대천의 발원지이다. 등산로가 사통팔달(四通八達)로 열린데다 산성고개에서 도로가 이어져 있고, 또 온천장을 잇는 케이블카 승강장이 600m 남짓한 거리여서 자동차나 케이블카를 이 용해 찾는 사람들이 많다.

 

 

금정산성 남문.


언뜻 보면 아무런 특징도 없는 듯한 남문은 동문이나 서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 는 신라의 산성 축조기법이 깃들어 있다는 주장이 있다. 금정산성은 조선 숙종 29 년(1703)에 축성되었다는 것이 <동래부지> 등의 공식기록이다.

그러나 일제강점 기 일본어로 된 <부산부사(釜山府史) 초고(草稿)> 제1권에‘금정산성이 원래 신라시대로부터의 성이라는 사실은 이를 면밀히 조사해 보면 알 수 있다. 즉 성의 4 대문 가운데 동·서 양문은 고려와 조선시대 개수한 흔적이 완연하나 남·북 양 문의 결구(結構)는 개수의 흔적이 있으면서도 신라의 수법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 이다. 이것은 문의 내외에 둔병(屯兵)의 사타 양식이 신라 특유의 축성기법인 반 원형 층단으로 세 겹 다섯 겹으로 되었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금정산성전돈대지발굴조사개보>는‘사타’가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금정산성의 신라 축성설에서 주장하는 특유기법을 지금의 남·북 양문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고 했다. 전문학 자들도 이러한데 보통 사람들이야 남문이 사적 제215호라는 것 정도만 알아두면 되지 않을까.

 

 

 

 

남문에서 망미봉 쪽으로 성은 가파른 능선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다. 바깥 쪽에는 사람이 별로 다닌 흔적이 없다. 성을 따라 미끄러운 산길을 7~8분 오르면 앞에 커다란 바위가 막아선다. 옆에는 목재계단을 세워 망미봉 옆까지 오르기 쉽도록 해 놓았다. 3~4분이면 해발 605m의 망미봉(望美峰)을 비켜 목재계단의 내리 막에 접어든다.
성은 산릉을 타고 오르듯 꾸불꾸불 뻗어 있다. 중간 중간에 바위가 서있어 자연 을 최대한 이용한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10분이면‘국가지점 번호 마라 4110 9381’의 헬리포트에 올라선다. 건너편의 생기봉을 향해 7~8분 내려가면 왼쪽의 만덕동과 오른편의 수박샘을 잇는 산길이 성을 넘는 갈림길(국가지점 번호 마라 4093 9395)과 만난다. 다시 오르막이다. 등산로는 오른쪽에 있고 성을 따라 6~7분 오르면 사방이 확 트인다. 제1망루(국가지점 번호 마라 4071 9404)가 있는 해발 620m의 생기봉(生氣峰)이다.

 

금정산성 제1망루.


사람에 따라서는 생기봉을 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상계봉(상학산)의 별칭으로 생각하나 여기서는 제1망루터가 있는 봉우리를 생기봉으로 본다. 제1망루는 조망이 대단히 뛰어난 명당이다.
금정산 전체는 물론 동해와 낙동강 하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복원되었 던 제1망루는 수년 전 태풍에 무너져 지금은 망루를 두르고 있던 투박한 돌담만이 남아 아쉽다.
성은 제1망루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상계봉과 파리봉을 잇는 능선을 따라 내려간다. 그런데 성벽 주변에는 산철쭉 등 잡목이 많아 접근하기가 어렵다. 등산로를 따라 가더라도 결국 다시 성과 만난다. 파리봉까지 1,300m의 등산로는 거의 성벽과 나란히 달린다. 

 

성은 파리봉 바로 아래에서 일단 끝난다.

 

파리봉정상 

산성마을 앞산으로 파리봉(玻璃峰) 또는 파류봉(玻留峰)으로 불리는 해발 615m 의 봉우리에는 옛날 망미루가 있었고 별장이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누각의 흔적 은 찾아볼 수 없고 최근 나무로 된 전망대를 세우고 서쪽으로 오르내리기 쉽도록 목재계단까지 설치했다.


성벽따라 계속 가려면 파리봉 표지석 북쪽으로 나 있는 목재계단으로 내려가 야한다. 옛날 위험한 곳에 로프를 설치해 놓았던 바윗길이 목재계단으로 바뀐 것 이다. 

계단 끝이 가까워지면 계단은 왼쪽의 화명동방면과 오른쪽의 금성동으로 나뉜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내려가면 계단이 끝나고 10m정도 아래에 갈림 길이 보인다. 바로 내려가면 공해마을로 가는 지름길이다. 왼편으로 방향을 잡아 1분정도면 파리봉을 넘어 성이 시작되는 곳에 올라서게 된다.

허물어진 성터 위 로 2~3분 내려가면 길은 성 안쪽으로 나 있다. 계속되는 내리막길은 한번 성 밖 으로 나왔다가 다시 성위의 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면 앞이 훤히 트이면서 곧 성을 잘라 도로를 만든 가나안 수양관 입구(국가지점번호 마라 4015 9530) 에 이르게 된다.


수양관 입구 잔디가 덮인 성위에 앉아 잠깐 숨을 돌린 다음 일어서면 곧 밭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돌아 도 로를 따라 나가면 오른쪽에 등너머 농원 간판이 있고 왼편으로 안심사 가는 길이 열려있다. 왼편 길따라 가 면 곧 오른쪽 성 밖의 묘지 앞으로 희 미하게 오솔길이 보인다. 이 길을 따 라 5분쯤 가다 성위로 올라서면 농장 은 끝난다. 성을 따라 난 등산로를 15 분쯤 내려가면 급경사의 내리막이다.

성과 가까워 졌다 멀어지기를 두어 차례 거듭하면서 10분 정도 내려가다 성이 북쪽으로 꺾이면서 성위에 올라서고 보면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성과는 헤어져 오 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등산로에 올라서면 곧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 내려가는 것이 도로에 내려서기 편하다. 도로 건너편에 이어진 성 안쪽의 돌계단을 따라 내려 가면 산성 17.337km 가운데 고도가 가장 낮은 해발 230m의 협곡에 서문이 있다.

 

금정산성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계곡에 세운 서문은 낙동강에서 대천(大川) 을 따라 오르는 산성마을 입구다. 계곡을 낀 성문답게 그 모습이 좀 특이하다. 서문의 초루와 ㄷ자 모양으로 돌출한 성곽의 모습은 사뭇 예술적이다. 또한 서 문 바로 옆으로 흘러내리는 대천(일명 화명천)에는 크고 묵직한 돌을 쌓아 세 개 의 아치로 된 수문을 만들고 그 위로 성곽이 통과하도록 했다.
남·북으로 험준한 성곽을 날개처럼 펼치고 있는 서문은 비록 그 고도가 낮지 만 계곡을 끼고 적을 방어하기에 아주 쉬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산성마을 죽전부락에서 서쪽으로 500m의 거리다. 산성마을의 서쪽 관문이다. 낙동강 하구 를 거쳐 대천을 따라 침입하는 왜적들을 막기 위한 시설이다.

금정산성 서문과 수문.


실제로 왜적들은 바다에서 바로 상륙하기도 하였지만 다대포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구포에서 만덕동으로, 또는 화명동 에서 대천을 따라 오르기도 하였다. 금정산성 의 동문과 서문은 스승과 제자가 같은 기간에 따로 세웠다는데, 서문을 조성한 제자의 실력 이 스승을 능가하였다는 것이 당시 주민들의 의견이었다고 한다. 실제 서문은 동문보다 규모는 작지만 훨씬 견고하고 아름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이다.


서문 안쪽에서 대천을 건너면 성벽을 따라 오르는 길이 열려있다. 성위를 6~7분 걸으면 여러 개의 바위가 앞을 막아선다. 오른쪽으로 돌아올라 5분정도 더 가면 평지다. 잘 다듬어 진 묘지 2기와 그 너머 민가를 보면서 2분 정도 가면 북쪽의 학생 수련원과 남쪽의 금성동 죽전마을을 잇는 옛날 오솔길과 만난다. 길에서 성을 따라 2~3분 올라가면 개발제한구역 표지석이 서 있다. 서쪽의 외성 과 중성의 서쪽 끝이 만나는 곳이다. 표지석에서 오른(동북)쪽으로 뻗은 것은 중성이다( *중성답사는 끝부분에).

 

장골봉 암문.

외성의 답사를 계속하려면 왼(서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급경사의 성을 타고 내 려가야 한다. 2~3분이면 성 밖의 성벽을 따라 가다 개울을 건넌 다음 오른쪽의 성 위로 2~3분 올라가면 곧 도원사 요사채 입구에 이른다. 절집 앞으로 곧장 나아가 면 성은 바위에 막혀 버린다. 바위를 우회하려면 30m 정도 되돌아 나와 북쪽의 무 덤 뒤 서쪽으로 난 희미한 산길을 따라 능선에 올라서야 한다. 능선에서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바꿔 2~3분 내려가면 성과 마주친다.


성을 따라가기를 2~3분이면 학생수련원과 그 앞으로 뻗어 있는 성이 내려다보 이는 바위에 올라서게 된다. 바위에서 왼쪽으로 돌아 서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성 밖이다. 앞에 보이는 계곡이 사시골로 수구문을 통해 물이 흐르고 그 옆에 석문도 있다. 수구문 못 미쳐 성 위로 바위를 디딤으로 올라가 걷다가 다시 성 안으로 내 려서야 암문을 볼 수 있다.

암문 안으로 들어가 성을 따라 서쪽으로 오른다. 숲 속으로 이어진 가람 낙조길은 성과 거의 나란히 가지만 때로는 가까웠다 멀어지기를 반복 15분 걸으면 고압 송전철탑 옆을 지나게 된다.

 

가람 낙조길과 헤어져 왼쪽으로 3~4분이면 서쪽으로 뻗어가던 성은 북쪽으로 살짝 방향을 틀어 반원을 그리며 능선을 향해 가다가 다 시 서쪽으로 향한 능선에 오른다. 성을 따라 6~7분이면 바위들이 앞을 막아선다. 왼쪽으로 돌아 오르기를 5~6분, 장골봉과 율리를 잇는 등산로와 만난다. 바로 위가 서문 쪽이 내려다보이는 망바위고 거기서 2분이면 해발 497.3m의 장골봉(長谷 峰)에 올라선다.

 

 

고당봉~북문 구간 전경.


고당봉에서 시작된 서쪽 성벽은 장골봉에서 직각으로 꺾여 사시골 수구문쪽으로 내려간다. 고당봉에서 장골봉까지를 물리재라 하고 장골봉을 물리재끝이라고도 부르며 성과 떨어져 석문이 돌을 이고 외로이 서 있다.


이정표에는 장골봉에서 고당봉까지 3.6km, 율리역까지는 3.8km라지만 실제로 올라보면 꼭 그렇지 않다. 고당봉까지는 처음 10여분을 제외하면 계속되는 오르 막이다. 성을 따라 등산로가 나 있지만 8분정도 내려가면 학생 수련원 뒤의 물리 재끝 제2석문을 지나면서 등산로와 답사로가 갈라졌다가 부산공무원교육원 갈림 길에서 등산로와 다시 만난다.

 

 

금정산북문

평지를 5분쯤 걸으면 오른쪽에 정수암 갈림길이 나온다. 등산로 오른쪽 바위에 빗물이 괴어 있는 홈이 있어 제 2금샘이라고 하여 이곳을 제2금샘 갈림길이라고도 부른 다.

다시 15분쯤 성을 따라 올라가면 금곡 동 갈림길이 나오고 5분을 더 오르면 미륵사로 빠지는 갈림길이 오른쪽에 있다. 미륵사 갈림길에서 20분의 거리에 등산로가 여 러 갈래로 나뉜다. 왼쪽 길로 들어서면 성은 곧 바위로 막혀 버린다.

이곳이 칠바위로 주변의 소나무와 잘 어울려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칠바위에 서 5분쯤이면 북문 지름길이 갈라진다. 왼편의 성벽을 따라 7~8분을 더 가면 고당봉 석문 앞에 선다. 석문이라고 하지만 그 흔적뿐이어서 다른 곳의 석문을 상상한다면 실망하게 마련이다.


고당봉에서 시작되는 서쪽 성의 시작점은 석문에서 30m 정도 더 올라야 한다. 선걸음에 고당봉에 올라도 되지만 석문에서 북문 쪽으로의 하산 길로 접어든다. 목 재계단 끝에서 30m 정도 아래 왼편에 서 있는 고당봉 설명판 뒤로 숲 속으로 빠지 는 옛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길 따라 가면 도중에 갈림길이 나오나 왼쪽 고당봉 아랫자락을 향해 2~3분이면 고당봉에서 시작되는 동쪽 산성의 시작점에 서게 된다. 성위로 옛길이 있으나 숲이 짙어 지나갈 수 없다. 성만 확인하고 되돌 아 나와 아래로 내려가면 곧 성을 넘는 등산로와 마주친다. 주등산로에서 성벽 왼 (東)쪽에 있는 금샘으로 가는 길이다. 4~5분 더 내려가면 앞에 바위가 막아선다. 사람들이 오르내린 흔적도 있다.
그러나 바위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좌우의 우회로를 따라가면 편하다. 오른 쪽으로 나아가 곧 주등산로와 만나면 20m 정도 북문 쪽으로 가다가 숲 속 길로 접어들면 된다. 왼쪽으로 40m 가량 내려가서 오른쪽의 바위를 향해 희미한 길 을 따라가면 바위를 우회(迂廻)할 수 있다. 좌우 어느 쪽이든 3분이면 다시 성에 올라선다.

 

성을 따라 내려가다 성 밖으로 나가 바위지대를 돌아 산죽 사이로 올라서면 바 로 아래가 복원된 성곽의 시작점이다.

성 안쪽으로 내려서면 곧 주등산로와 만난 다. 따라서 성 답사를 계속하려면 성 밖으로 나가 성을 따라 내려가면 10분 뒤에는 해발 580m의 북문에 닿는다.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주능선이 원효봉을 향해 다시 치켜 오르는 잘록한 안부다.


북문에서 범어사까지는 동쪽으로 1.6km, 금정산 주봉인 고당봉은 북쪽으로 0.9km이다. 산성 네 문 가운데 이 문이 가장 투박하고 거칠다. 다른 문과 달리 아치형의 장식도 없고 규모도 작다. 직사각형의 석문에 마지못해 문루를 세운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이 투박한 모습이 오히려 산성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나 할까. 이 문의 복원은 다른 성문들에 밀려 가장 늦었다.

원효봉~의상봉 구간 주능선.


북문에서 남쪽으로 성을 따라 오르려면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다. 안쪽에 능선을 따라 나있는 등산로가 있기는 하지만 짙은 숲이 성을 가려 성을 따라 오르는 재미를 느낄 수 없다.

성 밖에서 성을 따라 오르다 뒤돌아보면 고당봉까지 이어진 성과 그 가운데 우뚝 선 북문과의 조화가 아름답다. 첫 봉우리에 올라 건너편에 보 이는 조금 높은 봉우리가 원효봉(元曉峰)이다.

당장 앞에 막아선 바위 오른쪽으로 돌아 등산로를 버리고 성 밖으로 나가 내려 갔다 다시 오르기를 4~5분이면 일대가 바위로 된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원효암과 원효석대는 동북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능선을 따라 더 내려가면 의 상대도 있다. 원효봉은 아직 저만치 떨어져 있다. 바위 몇 개를 건너뛰며 성 옆길 에 내려서 6~7분을 더 가면 해발 687m의 원효봉에 올라선다.
남쪽에 건너다보이는 의상봉은 주능의 발 디딜 곳조차 없을 듯이 험한 등과 밋 밋한 산지로 된 서쪽을 가르는 듯한 성의 끄트머리에 우뚝 서 있다. 멀리서 보면 사자가 웅크린 모습이라고 하여 사자봉이라고도 부른다.  원효봉에서 등산로를 따 라 10여분 내려가면 오른(西)쪽으로 금성동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 갈림길 에서 등산로를 벗어나 빤히 쳐다보이는 암봉을 향해 성을 따라 오른다. 3~4분이 면 해발 640.7m의 의상봉이다.


남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제4망루까지는 3~4분의 거리다. 해발 620m의 능선상 에 자리하고 있는 제4망루는 외성(外城)의 동서를 잇는 중성(中城)의 동단이 만나 는 삼각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북문은 1.5km이고 동문은 2.5km다.

의상봉~동문 구간 주능선.

 

 

제4망루에서 성을 따라 내려가면 왼(東)쪽 으로 상마마을과 연결된 등산로가 성을 넘는다. 등산로에서 벗어나 왼쪽의 성을 따라 오 르면 나비암 북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던 길을 뒤돌아보면 무명암의 암장들이 펼쳐져 있다. 여기서부터 제3망루까지 일대가 여러 가지 바위들이 웅크리고 있는 아름다운 바위 공원이다. 바위너머로 살짝 지붕만 보이던 망루는 가까이 가면모습을감추어버린다. 망루광장에서 동북쪽으로 바위를 돌아가야 그 모습을드러낸다.

 

해발550m의암벽단애위에 절묘하게얹혀있듯이서 있는 제3망루는 북문까지 3km이고 동문은 1km의 거리이다.

 

제3망루 바로 옆의 부채암을 지나 5~6분이 면 왼(東)쪽으로 구서동 갈림길이 나오면서 잠깐 등산로와 만났다가 다시 왼쪽의 답사길 로 접어든다. 5분정도면 성은 소나무 숲 사이 로 뻗어 있다. 다시 5분 걸으면 오른쪽에 벚 나무 군락이 있고 왼편으로 장전동으로 이어 진 갈림길이 성을 넘는다.
갈림길서 5분 정도 걸으면 등산로와 만나 동문으로 내려가게 되는데 7~8분이면 넓 은 소나무 광장에 내려서고 이어 출발했던 동문에 닿는다.

 

 

중성답사

 

금성동과 학생수련원을 잇는 오솔길과 서 문에서 올라온 성이 만나는 곳에서 성을 따라 2분 정도 올라가면 개발제한구역 표지석이 있다. 산성 서쪽에서 동으로 뻗은 중성이 시작 되는 곳이다.

이 표지석에서 오른쪽으로 성벽 위를 5분가량 걸어 오르면 제법 넓은 밭 사이 로 성은 뻗어 있고 석문 앞에 내려서게 된다. 남쪽의 죽전부락과 북쪽 정수암을 잇는 오솔 길이 석문을 지나간다. 석문 남쪽에서 다시 산 으로 이어진 성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면 금성동과 공무원교육원을 잇는 도로와 만난다.

 

도로 위쪽의 잘 정리된 성을 지나 북쪽으로 계속 오르면 올라갈수록 성이 무너져 성돌이 뒹구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봉우리에 올라서서 5분정도면 다시 내리막이 시작되면서 제4망루와 의상봉도 보 인다. 5분 정도면 계곡을 건너서 얼마 안 되어 앞을 막아서는 바위를 오른쪽으로 돌 아 오르면 중성의 위용이 드러나고 이어 금성동과 북문을 잇는 지름길이 성을 지난 다. 장대는 북문 지름길에서 동남쪽으로 70m 정도의 거리이다. 동쪽으로 북문지름 길에서 조금 더 올라 다시 제4망루까지는 10분의 거리다.(※중성답사 약 1시간)

 

 

 

* 저작권은 부산산악포럼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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